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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ing sun above the blue East Sea DONGHAE 해오름의 고장 동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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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성

두타산성

두타산성

  • 시대고려시대
  • 소재지무릉로 584(삼화동)
  • 문의처공보문화담당관(☎033-530-2442)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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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성은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미로면 고천리, 하장면 번천리 사이에 자리 잡은 두타산(1362.7m)의 북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과 관련된 문헌을 살펴보면,〈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사에는 "두타산석성(頭陀山石城)은 부(府)의 북쪽에 있다. 둘레가 1,518보(步)(2760m)이며, 안에 세 골짜기의 물이 함께 흘러서 하나의 내(川)를 이루었는데 사철 마르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흥지원서에는 "두타산성은 부(付) 서쪽 40리에 있다. 석축(石築)으로 둘레가 8725척(2644m), 높이 6척(1.8m)이며 태종13년(1413)에 축성하였으며 후에 왜구들이 성을 함락시켜 성 안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두타산성은 서쪽 45리에 있다. 태종13년에 토축(土築)하였으며 둘레 8725척(2644m), 높이 8척이다. 후에 왜구들이 함락시켰다.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북삼면 삼화리, 두타산 국유림, 삼척의 남북 약사리, 삼화사의 남북 약일리, 두타산의 산정(刪定)에서 중복(中腹)에 걸친 고성으로서 주위 약 삼천간(三千間)(5,454m). 대부분이 붕괴하여 북면은 성벽을 잃음. 일만에 태종 삼년의 축조 왜구래 침함지라고 전함"이라 하였고, 〈전국유적목록(全國遺跡目錄)>에는 "북평면 삼화리, 국유, 삼보의 적사리 삼화사의 서북방 적일리 두타산이라 하였다. 〈임란유적총람>에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1414(조선 태종 14년)에 축성한 고성으로 임란에는 성남안동에서 남하해 들러오는 일본의 주력부대에 의해 함락된 곳으로 천해의 지세를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석축이 남아있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파직당하고 이곳에 은거 동안거사(動安居士)라 칭하며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했다고 전하며, 또 임란 시 3일간 격전 끝에 요기의 비밀통로를 적에게 주설 함락되었다 한다."고 하였다. 현재 삼화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약 1.5km쯤 가면 왼편으로 산성 입구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데 지형으로 보아 이곳이 과거에도 산성으로 드나들던 출입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곳에서 급경사가 진 산비탈 길을 427m 정도 올라가면 두타산성 입구가 있다.

오른쪽으로 수십 미터에 달하는 천연 암벽이 있어서 그 사이에 성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입구가 있다. 입구는 큰 바위가 자연적으로 좁은 통로를 만들어 놓고 있어 천연의 요새지(要塞地)이다. 두타산성은 이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입구에서 이 암벽까지는 사이사이에 성을 축조하여 자연의 암산에 인공의 석축을 조화시켜 요새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미터를 지나면 여기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786고지에 이르러서는 우측으로 약간 구부러져 남쪽으로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다. 880고지에는 동장대(東將臺)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고, 여기서 다시 1032고지까지 연결되었다. 이곳에는 남장대(南將臺)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고 이 1032고지 정상에서 지금까지 남쪽으로 연결되던 산성은 완전히 90도로 각도를 바꾸어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큰 계곡 쪽으로 하향하여 축조되었다. 1032고지에서 1232m 정도 하향하면 서장대(西將臺)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고, 이 지점에서 90도로 방향을 바꾸어 북쪽성과 연결되는 성을 쌓았다.

그리고 서장대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지점에서 직선으로 연결된 성은 217m 정도 아래로 축조되어 입구에 쌓은 성과 나란히 대칭을 이루고 있다. 또한 동북쪽의 786고지에서 동북쪽으로 흘러내려 가는 능선을 따라 체성(體性)에 연결된 외성이 축조되었는데 이 성은 부근의 786고지를 거쳐 계속 능선을 따라 약 1886m 정도 축조되었으며, 체성의 내성으로 동쪽 축성(築城)선에서 안쪽으로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능선이 끝나는 곳에서 그쳤는데 623m에 달한다. 성안에는 계곡과 돌우물 50개소가 있어 산성의 필수요건인 물이 흔하다. 성은 북면으로 무릉계곡 건너편 삼화사의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을 바라보는 위치에다 산세가 험하고 가파르다.

성의 축조년대는 1414년(태종 14년)에 부사 김맹균이 쌓았다고 전하나, 조선태조의 5대조인 목조대왕 이안사(李安社)가 몽고의 지굴이 1253년 고려를 침략할 때 두타산성을 보전하면서 난을 피했다는 〈조선실록(朝鮮實錄)>의 기록이 보이고 있어, 이 성은 이미 1253년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체성의 형태는 타원형이고 그 둘레는 약 4,907m이며 계곡의 축성되지 못한 부분 60m를 합하면 4,175m이다.

또한 이 체성에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동쪽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두개의 외성과 체성도 북쪽에서 같은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연결된 또 다른 외성이 있다. 서쪽 외성이 217m, 북쪽 외성이 484m, 동쪽 외성이 1,886m로서 외성의 전체 길이는 2,587m이며 체성의 동북쪽에서 능선을 따라 서쪽을 향하여 체성으로 연결된 내성(內城)이 있는데 그 길이는 623m로 총길이는 7,217m의 매우 큰 산성이며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를 보이는 산성이다. 이 산성은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또는 다른 일반적인 산성에서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는 산성으로 그것은 두타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최소의 병력으로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당시 축성인들의 지혜를 발휘하여 축성한 것이다. 즉 두타산 북쪽 산록(山麓)의 험준한 지형과 암벽을 최대한 이용하고 산의 능선이나 산정의 지형을 최대로 이용하여 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산성은 현재 석축(石築) 일부가 허물어지기는 했으나 옛 자취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큰 산성 중의 하나로서 자연 지세(地勢)를 최대한 활용하여 쌓은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 등의 특이한 구조를 지니는 산성이다. 따라서 한국의 고대산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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